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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도 도전 살펴보기/탄강

[증산도 도전] (1-49) 객망리를 범치 못함

by hopyumi 2021. 4. 12.





1 동학군이 황토현에서 멀지 않은 도마다리 야산道橋山에 진을 치니, 인근 객망리 사람들이 동학군과 관군의 격돌로 인한 폐해를 염려하나,

2 성부께서 워낙 힘이 센 장사로 알려져 있는 데다 증산의 신이하심을 두려워하여 관군과 동학군 모두 황토마루 너머 객망리 부근은 근접치 못하더라.



<청국과 일본의 개입>

3 4월 7일 새벽에 동학 농민군이 황토현에서 대승을 거두고 그 기세를 몰아 정읍·흥덕·고창·무장·영광·함평을 차례로 점령해 나아가니 그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하더라.

4 이어 23일에 동학군이 장성長城 황룡촌黃龍村 전투에서 초토사招討使 홍계훈洪啓薰이 이끄는 관군을 대파하고 북으로 전주를 향해 진격하니,

5 홍계훈이 관군만으로는 동학군을 진압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청국군 차병借兵을 조정에 요청하니라.

6 이 때 청국과 일본은 조선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사태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으니 당시 일본의 총리대신은 이등박문伊藤博文이라.

7 동학군이 27일에 전주를 점령하니 이에 놀란 조정에서는 마침내 청淸에 차병을 요청하거늘,

8 5월 초순에 청국군 3천여 명이 아산牙山으로 들어오니,

9 때를 엿보던 일본군 또한 곧이어 4천여 병력을 이끌고 인천에 상륙하매 삼천리 강토에 짙은 전운戰雲이 감돌더라.

10 동학군이 전주성을 점령한 이후 대치하던 관군과 동학군은 잇단 외세의 개입을 경계하여 화약和約을 맺으니 이로써 동학군이 일단 해산하니라.

11 이에 조정에서는 양국에 동시 철병을 요청하고 청 또한 일본에 동시 철군을 제의하였으나, 일본은 난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과 조선의 내정개혁을 구실로 이를 거부하니라.




<콘텐츠 출처 - 증산도 도전道典 1편 4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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