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의 비밀] (1-1-3) 스페인독감의 악몽
전문가들이 우려했던 대로 2009년에 괴질이 발생하였다.
신종플루라고 이름 붙여진 이 변종 바이러스는 돼지, 인간, 조류에 기생하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돼지의 몸에서 유전적으로 뒤섞여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전문가들이 신종플루에 대해 긴장을 늦추지 못했던 까닭은 이 신종플루가 지난 20세기 초, 최단기간 동안 엄청난 죽음을 몰고 와 전 세계를 경악케 했던 스페인독감과 같은 유형[H1N1]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스페인독감이 맨 처음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해서 치명적인 바이러스로 발전했는지, 아직까지도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1914년에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 이전 유럽을 휩쓸던 1918년 초, 프랑스 국경과 닿아있는 스페인 북부 해안 마을, 산세바스티안에 독감이 찾아왔다.
전염 경로는 분명치 않지만 독감은 거의 동시에 군인들에게로 옮겨졌다.
그리고 3월이 되자 독감은 유럽으로 이동하는 미군부대에 도착하였고, 프랑스에 주둔한 미군 병사들이 독감으로 앓아눕기 시작했다.
이후 스페인에서는 국왕을 비롯하여 800만 명이 독감에 걸렸으며 영국 등 유럽 여러 나라와 미국, 중국과 일본 등 아시아 국가에까지도 병이 확산되었다.
그때 사람들은 이 독감을 '3일 열병' 이라 불렀다.
사나흘 정도 열이 펄펄 끓고 얼굴이 붉게 변하며 온몸의 뼈가 욱신거리고 머리가 부서질 듯 아프다가 땀을 흠뻑 흘리고 나면 가라앉았기 때문이다.
전염성은 매우 강했지만 여느 독감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 어느 샌가 모습을 감추었는데 이해 8월, 초가을로 접어들자마자 바이러스가 변이를 일으켜 다시 나타났다.
이때는 이미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독감과 닮은 점이 거의 없는 괴물로 변해 있었다.
다시 등장한 스페인독감은 마치 복수의 화신처럼 인도, 동남아, 일본, 중국, 카리브해의 상당 부분, 미국, 중남미 등지에서 대규모 사망자를 냈다.
그 치사율이 일반 독감의 250배가 넘었다.
인류는 이제껏 듣지도 보지도 못한 새 바이러스의 공격에 너무도 무력하게 쓰러졌다.
일찍이 다른 어떤 전염병이나 전쟁, 기아도 이렇게 짧은 기간 동안 그토록 많은 사람을 죽인 예는 없었다.
스페인독감은 20세기에 창궐한 각종 전염병들이 명함을 내밀기도 어려울 정도로 참혹한 영향을 끼쳤다.
말 그대로 아비규환, 가정은 파괴되고 아이들은 고아가 되었다.
독감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얼마나 끔찍했는지, 그 이야기를 입에 담는 것조차 꺼려했다.
스페인독감에 감염된 사람은 전 세계 인구(18억 명)의 30퍼센트 정도이고, 사망자는 대략 5천만에서 1억 명이었다(인도에서만 2천만 명이 사망하였다).
1차 세계대전에서 전쟁으로 죽은 사람 수보다 10배나 많은 사람들이 독감으로 목숨을 잃은 것이다.
1918년 9월, 미군 기지에 근무하던 한 의사의 편지 내용을 통해서 우리는 당시의 참상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데번스 기지는 약 5만 명의 병사를 수용하고 있었네.
독감은 4주 전에 기지에 들어왔네.
어찌나 빨리 퍼지는지 병사들의 사기가 엉망이 되고 독감 때문에 정규 훈련이 금지되었네.
병원으로 실려 온 병사들의 증세는 빠르게 폐렴으로 발전했는데, 그렇게 심한 폐렴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네.
폐렴 소견을 낸 2시간 뒤면 벌써 광대뼈 부위에 적갈색 반점이 보이고 몇 시간 후에는 귀에서부터 온 얼굴에 청색증이 나타나 백인과 흑인을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였네.
죽음은 단 몇 시간 만에 찾아오네.
환자들은 숨을 헐떡거리다가 숨이 막혀 질식해 버린다네.
불쌍한 병사들이 파리처럼 죽어나가는 것은 눈뜨고 보지 못할 참상이야.
하루 평균 백 명이 죽어 나가는데도 질병의 기세는 꺾일 줄을 모른다네."
스페인독감은 군대의 전투력을 무력화시켰으며, 이 때문에 미국의 윌슨 대통령도 서둘러 전쟁을 종결시키고자 했다.
스페인독감이 다시 대규모로 창궐한 지 2~3개월 후인 1918년 11월 11일, 제1차 세계대전은 막을 내렸다.
전염병이 전쟁의 종결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것이다.
전쟁으로 피폐해져 있을 때 찾아와 전 세계를 휩쓸던 스페인독감은 신기하게도 전쟁이 끝난 뒤 차츰 자취를 감추었다.
(목차 - 제1편 더 큰 병란이 몰려온다 / 1. 세계의 공포, 전염병 대유행 / (3) 스페인독감의 악몽)
(콘텐츠 출처 - 『생존의 비밀』)